공의 휘는 광식(光軾)이고 자는 백흠(伯欽)이다. 성종 24년 계축 1493년 9월 29일 동지돈녕부사 휘 지방(之芳)과 정부인 청송심씨의 1남2녀 중 외아드님으로 탄신하여 명종 18년 계해 1563년 12월 1일에 71세를 일기로 별세하셨다. 증 정부인 함안이씨(咸安李氏)는 정국공신 함안군 이세응(李世應)의 따님이셨다. 부인은 성종 23년 임자 1492년 12월 1일에 탄신하시어 중종 31 병신 1536년 10월 7일에 45세로 별세하셨다.
시조 휘 양식(陽植)은 고려인종조에 등문과하여 벼슬은 좌복야에 이르렀고, 2세 휘 순우(純祐)는 의종때 장원하여 공역승겸 직한림원으로 태후의 병이 낫기를 축원하는 기도문을 지음으로 총애를 받아 벼슬이 누차 승진하여 금성군에 봉해지고 국자대사성에 이르렀으니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고려명신전에 나타나 있다. 휘 순우의 아들 3세 휘 적(迪)은 호장이고, 휘 적의 두 아들 4세 휘 홍준(洪俊)과 공용(公用) 중 홍준은 중윤과 호장을 역임했고, 홍준의 아들은 5세 휘 구(球)인데, 1282년 원나라에 들어가 제과(制科)의 진사시에 합격하고 환국후에는 고려조정에 중용되어 예빈시경동정에 이르렀으며 삼척 죽서루에 그가 동료 2인에게 헌정한 시2수가 관동이군자시라는 별칭으로 전해진다. 휘 구의 두 아들 6세 휘 백경(伯卿)과 천승(天升) 중 휘 백경은 영동정이고, 휘 백경의 아들 7세 휘 사성(思城)은 밀직대부로 추봉 중추원사이다. 휘 사성의 아들 8세 휘 억(山+疑)은 공민왕조에 문과급제하여 유장으로 강계원수 재임 중 동료들과 선봉으로 요동을 정벌하고 돌아와 용맹을 인정받았으며 밀직부사에 이르러 이태조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개국하고 도평의사사의 벼슬을 내렸으나, 충신은 불사이군이라 하여 순흥의 소백산으로 낙향하였다. 태조가 훗날 식물과 전지를 내렸으나 모두 고사하여 쌓아두니 그곳을 구두들이라 하였으며, 불사이군의 절의로 평생을 은거하였으니 나라에서 그 충절을 가상히여겨 특별히 원종공신1등관에 녹훈하고 불천위로 명하였으며 가정대부 중추원부사 겸 도평의사사사 의흥친군위동절제사가 추서되었으니 동사강목, 고려사, 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에 사실이 나타나 있다. 휘 억의 아들 9세 휘 만(蔓)과 원길(元吉) 중 휘 만이 곧 공의 5대조이다. 휘 만은 고려조에 무과에 등제하여 홍로부사, 인진사를 거쳐 1392년 중추원부사 사재감에 이르렀으나, 조선 개국후 봉렬대부 호분위경력으로 가하되셨다가 뒷날 판중추부사로 증직 추서되셨다.<양경공묘갈명 및 행장,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홈에서 발췌한 자료> 휘 만이 계림부원군 양경공 정희계(鄭熙啓)의 따님을 취하여 휘 인숙(仁淑)과 민무휼(閔無恤)에게 출가한 따님을 낳고, 고조부 휘 인숙(仁淑)은 음보로 사정 통훈대부 중추원경력을 거쳐 지덕천군사와 판사복시사를 역임하고, 지인천군사 증 호조판서 오부(吳傅)의 따님을 취하여 경창(景昌), 경연(景衍), 경생(景生), 경화(景華)와 세 따님을 두셨으니<대동보>, 증조부 휘 경연(景衍)은 음보로 소위장군 행충좌위 부사정과 호군을 역임하고 통정대부 형조참의에 증직되셨다. 휘 경연이 교리 남숙문(南淑文)의 따님을 취하여 휘 징(徵)과 휘 숭(崇)을 두고, 조부 휘 징(徵)은 군관으로 충찬위에 보임되었으며 선무랑 목청전직에 이르렀고,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가 증직되셨다. 휘 징은 사헌부장령 허적(許迪)의 따님을 취하여 휘 지방(之芳), 휘 지영(之英)과 정현조와 이오에게 각각 출가한 두 따님을 두셨으며, 휘 지방이 곧 공의 고가 되신다.
고휘 지방은 1489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북정부원수 이계동(李季仝)의 부관으로 출정하여 야인의 수급을 베어온 이래, 명나라 위사를 수행하여 명나라에도 다녀왔고, 종성회령부사와 의주목사 북병사를 지내고 중종의 왕비 윤씨(尹氏) 책봉시 1516년 명나라에도 다녀왔으며 경상좌병사, 함경남도병마사, 평안도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며 누차 야인을 정벌하여 명장이라는 별칭이 붙여졌으며, 훈련원도정,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동지돈녕부사 겸 오위도총부부총관에 이르렀으니 연산군일기, 중종실록, 대동야승, 연려실기술, 국조보감 등에 이 사실이 나타나 있다. 비위 정부인 청송심씨(靑松沈氏)는 군자감직장 휘 안신(安信)의 따님이며, 조부는 관찰사 증 영돈녕부사 망세당 휘 선(璿)이다.<우계이씨대동보>
1493년에 공이 탄신하였다. 공은 일찍이 무재에 능하여 1516년 무과에 급제하고 이듬해 권관, 1522년 병조좌랑을 거쳐 23년 사어로 승진하였다. 이때 승진이 빠르다 하여 시기하는 자들이 논박을 가했으나 왕이 듣지 않으셨다. 1525년 군기시첨정이 되고, 명년 승진이 부당하다며 논박하는 자들이 있으나 역시 왕이 듣지 않으셨으며, 1527년 변방수비가 급하다는 보고로 종성부사에 보임되었다. 이해에 부친 지방이 명나라 황후의 붕으로 진향사가 되어 가던 도중, 발병하여 되돌아왔다가 유배되자 부인 이씨가 시부의 병이 위중함과 병구완을 할사람이 가까이 없음을 들어 이배를 청하는 상언을 올렸다. 1528년 군기시부정에 보임되었다가 30삭을 채우지 못하고 승진했다는 논박을 듣고 사직하였다. 그해 김해부사로 나갔다가 변방수비가 급하다는 대간의 청으로 갑산부사, 1529년 다시 종성부사로 근무하며 변방의 야인들을 격퇴하였다. 1531년 함경도 변장들이 변방의 야인들을 함부로 죽였다가 이에 불만을 품은 야인들이 삼둔을 노략하여 변장들을 추고한 후 친히 야인소굴로 들어가 야인들을 위문하여 다시는 노략질을 못하도록 하였다. 1533년에 가선대부로 가자되었다가 가자가 부당하다 하며 공을 시기하는 사헌부 관리들이 있었으나 왕이 듣지 않으시고 여주목사로 보임하였으나 변방이 급하다는 간원의 청으로 다시 종성부사로 보임되었다. 1536년 동지 송숙근과 함께 좌우위대장에 각각 보임되어 행군을 하였으나 농번기 행군미숙으로 추고받으시고 풀려났다. 1538년 성주목사가 되셨으나 공을 시기하던 사헌부관리에게 용렬하다는 탄핵을 받았으나 왕이 듣지않으셨다. 동년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1543년 평안도병마절도사로 출보되었다. 명년 변방의 달적이 군영에 쳐들어와 변장들을 살해하자 왕에게 장계를 올려 변방수비를 강화시킬 것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으니, 동년말 무기개수의 상소를 올리고 직접 달적을 토벌하고 돌아왔다.<중종실록> 1546년 정조물을 대비 윤씨에게 먼저 진상하였다가 논박을 받았으나 윗전을 먼저 돌보는 것이 상례라는 승정원의 변호로 왕이 무마시켰다. 바로 동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명종실록>, 그해 의정부와 병조에서 장수를 뽑을 때 장언량, 양윤의와 함께 장수에 뽑혔으니 이는 국조보감에 나타나 있다.<국조보감> 동년 병조참판, 47년 동지중추부사, 상호군과 비변사당상이 되었으며, 비변사당상으로 논의에 참석하여 세조의 신주 철거 및 인종묘를 문소전으로 옮기는 것을 논하였다. 1548년 다시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고 동지중추부사, 한성부좌윤, 1549년 특진관으로 보임되었다. 특진관으로 있을 때, 변방의 만호나 첨사가 좋은 말을 어거지로 매수하매, 변방에 좋은 말들이 없어지는 부당함을 간하여 시정하게 하였으며, 1550년 2월에는 송숙근 등과 더불어 흉년이 든 함경도에 남방의 곡식을 옮겨줄 것을 간하였다. 1550년 행장례원판결사, 비변사당상, 1551년 병조참판, 호군, 1553년 한성부우윤, 동지중추부사, 병조참판, 1554년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1555년 왕명으로 전라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어 사은숙배하고 부임하였다. 전라도병마절도사로 있을 때 해안을 침략한 왜적이 변장과 군졸들을 죽이고 10진을 함락시켜 난을 일으켰으나, 분란을 수습하고 적을 토벌하여 병란을 평정하였다. 1557년 경상감사를 거쳐 다시 병조참판이 되었다. 중종과 명종의 실록과 국조보감에 나타났으며, 명종실록에는 공이 지략이 뛰어나며 집안이 엄숙하고 몸가짐이 맑고 검소하게 생활하였다 한다.<명종실록> 1563년에 별세하니 수 71세였다. 뒤에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하였다. 공은 광주 언주면 원지동 건좌에 장사하였는데, 이곳은 지금현재 서울특별시 서초구 원지동 건좌이다.<우계이씨대동보>
배위 증 정부인 함안이씨(咸安李氏)는 정국공신 평안도관찰사 함안군 양간공 세응(世應)의 둘째따님이다. 조부 계통(季通)은 사재감부정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 함성군(咸城君), 증조부 흥손(興孫)은 사재감부정 증 통정대부 병조참의, 고조부 휘 적(積)이다. 모친은 김씨(金氏)로 사헌부집의 미(楣)의 따님이다.<국조인물고 이세응편 참조> 부인이 3남 1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감(戡)이고, 차남은 전(晋+戈)이고, 삼남은 용(庸+戈)이다. 감은 중종 38년 1543년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 검열, 봉교, 정언, 수찬, 종성 장흥의 부사, 경기 경상 황해도 감사, 이조 병조 형조의 참판, 동지중추부사,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전은 중종 34년 1539년 무과에 급제하여 호조정랑 경흥부사 사도시첨정 동부승지 좌부승지 겸경연관 공조참판 북병사 회령부사 전라병사 경상우병사 경상좌병사 평안도병마사 훈련원도정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 포도대장 수성대장 경연특진관 비변사당상 군기시제조 등을 지내고 임란 중에는 수성좌위장 수성대장 검찰부사 유도대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어가를 서북으로 호종하고 임금에게 전략12조를 헌책한 공로로 지중추부사에 이르렀으며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이 증직되었다. 용은 명종 5년 1550년 무과에 급제하여 함경남도와 함경북도의 방어사와 병마절도사를 역임하고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감은 풍천인(豊川人) 좌참찬 정헌공(貞憲公) 임권(任權)의 따님을 취하여 성헌(成憲)과 파평인(坡平人) 윤유후(尹裕後)에게 출가한 딸을 두었고, 예천인(禮川人) 윤연수(尹延壽)의 따님을 취하여 희헌(希憲), 유헌(有憲), 의헌(宜憲)과 안동인(安東人) 권봉수(權鳳壽)에게 출가한 딸을 두었다. 전은 좌랑 이광택(李光澤), 부장 이윤경(李允경)의 따님을 취하였는데, 준헌(遵憲), 경헌(敬憲), 봉헌(鳳憲), 승헌(承憲)과 청주인(淸州人) 동지중추부사 한강(韓綱)에게 출가한 딸을 두었다. 용은 동지중추부사 송맹경(宋孟璟), 현령 증 좌찬성 귀원군 윤이(尹伊)의 따님을 취하였는데 자녀 기록이 실전되었다. 딸은 파평인(坡平人) 윤강(尹綱)에게 출가하였다. 윤강은 참판 이중경(李重慶)에게 출가한 딸을 두었다. 이하 내외자손 다수가 많이 번성한 관계로 삼가 모두 다 기록하지는 못하노라.<우계이씨대동보>
나라가 위태로울 때 뛰어난 지략을 발휘하여 호적과 왜적을 격퇴하여 사서에 이름이 났으니, 그 이름도 드높아라. 이하 내외자손 다수가 번성하였으니 이또한 공의 뛰어난 덕망을 나타내는 것이리라.